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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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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래의남자 2020. 8. 8.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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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일년의 반이 지나진 않았지만 올해 들어 구입한 책을 정리해 보았다. 인문과 문학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 분야의 책을 합하니 25권이었다. 평균적으로 한 달에  4~5권의 독서량을 이어왔다. 뭐 그렇다고 책을 사서 모두 정독하는 것은 아니다. 스터디 책 같은 경우는 필요한 부분만 공부하거나 <옥스포드 세계 영화사>같은 방대한 책은 참고를 위해 구입한 것이니 책을 읽었다라기 보다는 책을 구입해두었다라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하지만 독서에 대해서 새롭게 생긴 습관이 있는데 새로운 책을 읽는 것보다 그 이전에 읽었던 좋은 책을 다시보는 것이 여러모로 유익하다. 책장을 채우는 독서보다는 머리를 채우는 독서에는 좋은 책을 다시 읽어보는 반복학습이 최고라는 것을 깨닫는 요즘이다.

자연스레 최근들어 새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후 민주적 성향의 정치인들 가운데 희망을 옮겨갈만한 인물들에 대한 생각을 해봤다. 서울역 분향소에서 유시민을 실물을 처음 보면서 '아마도'라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관심과 애정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밝힌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유시민 관련 제목만 보아도 꼭 챙겨보는데, 미디어법 관련 강의 동영상을 보다가  하인리히 뵐의 소설을 한번쯤 읽어 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왜곡된 언론 보도가 낳은 참극. 한 여성을 살인자로 몰아가게 만든 상황을 역추적해가는 그 스토리가 최근의 사건과 무관하지 않음을, 또 이 책을 대학생들에게 읽어보라고 말하는 유시민의 마음 속에는 부디 젊은이들에게 심미안만을 키울 것이 아니라 진실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시각을 가지길 소망하는 목소리가 느껴졌다.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보다  호감이 가는 사람이 읽어보라며 권해주는 책은 꼭 읽고 싶어지더라. 그리하여 책을 손에 들고 읽어 내려가는데 이것은 픽션이 아니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차이퉁> 신문을 <조.중.동>이라 바꿔 해석하며 읽어가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저자인 하인리히 뵐은 책의 서두에 이 소설의 내용이 당시 독일의 상황과 특정 신문사의 스캔들을 관련이 없다고 밝혔지만 그것은 단지 역설적인 표현일뿐. 책의 뒷 편에 실려 있는 작가의 후기와 작품 해설에는 독자들이 직접 사리를 판단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싣고 있다.

요즘들어 세상에 향한 나의 시선은 민주주의의 후퇴보다는 휴머니즘의 상실를 발견한다. 그것이 전체인지 부분적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어쨋든 눈에 보이는(언론을 통해)것들을 사리를 따져가며 이해해보면 계급(?)적으로 위로 갈수록 휴머니즘은 이미 부패되어 썩은내가 진동한다. 남의 탓하기 전에 내 허물부터 보자는 심상에 내 안의 개똥철학에 뭔가 양분이 될만한 철학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누군가는 이 사진을 보면서 '아! 이거 유명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임을 알 수 있다. (당신은 알고 있었나?)
누군가는 이 사진을 보면서 '아! 저 사람은 유명한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임을 알 수 있다. (당신은 알고 있었나?)

처음 이 사진을 접했을때 나는 이 사진이 브레송의 사진이란 점만 이해했다. 사진의 구도를 생각해보고 사진 속 인물의 분위기에만 주목했다. 어느쪽을 주시하는지 파악하기 힘든 저 인물의 시선이 범상치 않다. 그래서 이 사진이 유명한가. 하지만 뒤늦게 저 인물이 사르트르임을 깨달았다. 이 작은 에피소드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정보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떠 오른다. 사르트르가 주장한 철학의 핵심은 무엇인가?

"내가 이런저런 행위를 옳다고 고려할 경우,
이 행위가 나쁘지 않고 옳다고 말할 것을 선택하는 것 또한 나 자신입니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사르트르가 1945년 파리에서 강연한 내용을 담은 텍스트이다. 일반 철학 책과는 다르게 대화체의 느낌이 다. 그가 주장하는 실존주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너무 장황하지도, 너무 요약적이지도 않은 적절한 분량이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과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함께 읽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내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한다. 때론 누군가의 강압에 의해 선택의 자유를 포기한다. 하지만 그 강압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자신의 선택이었음을 인정해야한다. 사르트르는 선택과 더불어 책임을 이야기한다. 자신이 선택한 결과에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 그 책임을 인정할때 비로서 휴머니즘은 살아나는게 아닐까. 자신이 쓴 기사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다면 카타리나에 대한 기사는 결코 그렇게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이 모두가 아님을, 내가 아는 것이 진실이 아님을, 내 판단이 항상 옳다는 생각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삶은 불안 그 자체가 된다. 하지만 그 불안이 삶을, 혹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영화 <다우트>는 이러한 상황을 잘 담아낸 영화이다. 영화는 진실이 무엇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대신 진실을 놓고 서로 대립하는 두 주인공의 모습에 집중한다. 한치의 물러섬없이 상대방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라며 싸움을 벌인다. 두 주인공은 서로를 의심하지만 결코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사건은 신부가 학교를 떠나는 것으로 종료된다. 하지만 수녀 원장은 뒤늦게 눈물을 흘리며 고백한다. 자신의 정말로 옳았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고.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휴머니즘'이며 그녀가 느끼는  '불안감'은 이제 그녀가 '변화' 할 것임을 예감하게 한다. 메릴 스트립과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매서운 연기력을 담아낸 <다우트>를 보며 우리에게 필요한 '자기 의심'을 한번 판단해 보시길.

 

내가 어떤 이념(신념,철학,종교,믿음,경험)을 지니고 있던지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말하고, 행동할때는 자유보다는 먼저 책임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다시 <다우트>에 나오는 장면을 예로 들어자. 확인되지 않는 소문을 퍼트린 한 여인이 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부탁하자 신부는 베개를 높은 곳에 가져가 찢어보라고 한다. 당연히 베개 속에서 수많은 깃털들이 바람을 타고 온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다. 그 깃털을 다시 주워모으기란 불가능하다. 카타리나의 잃어버린 명예도, 우리의 잃어버린 대통령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앞으로 나부터 의심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도 의심할 것이다. 당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것이며 항상 사리를 따져볼 것이다. 그러니 당신도 나의 이야기를 들을때 똑같이 해라. 그럼 나는 당신에게 좀 더 진실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함을 의식할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러니 당신도 노력해라. 언젠가는 우리 모두 휴머니스트가 되길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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